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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6 23:00

슬픈 외국어 2 - 안녕, 독일어 슬픈외국어2010.09.26 23:00

 

대학 3학년 즈음에 근대철학을 들으며 전공에도 뒤늦게 좀 재미를 붙이게 된 나는 대륙의 합리론, 영국의 경험론으로 정리되는 영국, 프랑스 중심 이야기에도 잠시 매혹되기도 했지만 워낙 칸트의 무게감이 큰 나머지 그의 매력에 슬그머니 빠지게 되었다. 철학사 책을 비롯 칸트해설서들(워낙 넘치도록 많다)을 읽다보니 역자에 따라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게 되고, 개념어 다르게 쓰는 거야 금방 적응해 냈지만 곧 원서로 읽고 싶다는 턱없는 욕심이 생겼다. 솔직히 그 욕심이 강렬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어나 제대로 공부하자, 아니다 영어부터 좀 해놓고 까불자, 아니다 우리말로 된 책이나 더 읽자 등등 현실적 고민들 때문에. 하지만 그정도 만으로도 자연스레 독일어 바람이 들게 하기엔 충분했다. 게다가 프랑스어부터 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 수준이 될 때까지라고 한정할 수 없었고, 영어부터 좀 이라고 해봐야 역시 마찬가지 문제였다. 외국어를 '마스터' 한다는 게 어찌 보면 불가능한 일이겠지 싶었다. 어차피 라틴어 파생언어들 같이 좀 사랑해 주지 뭐 하고 시작된 독일어 바람. 

독일어라곤 아베체데 abcd 와 Ich liebe dich. 밖에 모르던 내가 덜커덩 남산쪽에 있던 괴테인스티튜트에 등록했다. 우선 알리앙스보다 훨 비싼 등록금에 놀라고, Vive la France! 독일보다 프랑스가 더 좋은 이유 하나 추가, 투덜투덜 했지만, 역시 비싼 만큼 열심히 다니리라 싶어 쌈지돈 쾌척했다. 게다가 문법위주가 아니라 회화위주 클래스니까 뭐 하는 가벼운 마음도 있었다. 주변 친구들과 가족의 반응은 아주 뜨거웠다. "한 개 만 해!", "걍 알리앙스나 계속 다녀" 이 정도는 정말 애정 어린 충고였고, "영어나 좀 하지?", "독일문화원에 기부?" 등의 비아냥이 대부분이었다. 그래 강철은 두드릴수록 단련되는 법. 반년만 지나봐라 내가 독일어로 비웃어주지. 

수업은 놀랍게도 정말 ABCD 부터 시작되었다. 만약 다른 것을, 이를테면 PC관련 소프트웨어, 배울 때 이런 식이었더라면 나는 짜증이 확 몰려왔겠지만, 정말 Guten tag! 하고 Auf Wiedersehen! 사이에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고 들리지도 않는 나에겐 무척 적절한 교수법이었다. Besten Dank! Kris 쌤. 

하지만 진전은 없었다. 그렇게 쉽게 시작했지만, 외워야 할 것은 너무 많았고 게다가 단어 외우기 전에 반드시 외워야만 할, 데르데스뎀덴, 디에데르데르디에, 다스데스뎀다스, 디에데르덴디에. 이건 다행인지 아직 안까먹었군. 그리고 아인아이네스아이넴아이넨,… 관사는 영어가 더 어렵다고들 하지만 독일어 결코 만만치 않다. 외국어 공부라는 건 정말 장기레이스를 각오해야 하는데 뭐가 그리 조급했는지 원.

그나마 다행인 것은 타고난 뻔뻔함이랄까? 모르면 모르는 대로 떠들기는 잘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모든 외국어에서 문법을 잘 모르는 나의 문제가 되었을지도. 혹자는 아니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문법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건 문법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모범생들에게 하는 소리고 나에겐 해당하지 않는다. 여튼 명사의 성, 수 등 문제는 불어에서 이미 겪을 대로 겪어봐서 낯설지는 않았고, 동사의 변화도 상당히 규칙적인 편이라 일단 볼 때는 머릿속에 잘 들어온다. 외워지지 않아서 그렇지. 문장을 만들어 외우는 게 당연히 낫겠다 싶어서 기본문장들을 외우기 시작했으나. Dies ist das buch. 이 것은 책입니다. 따위의 말을 대체 어느 순간에 써먹을 수 있단 말인가.(혹 문장외우기 하시는 분이 있다면 성/격 도 바꾸고 단어도 바꿔서 정말 써먹을 수 있는 문장으로 외우시길) 외운 문장을 적시적소에 써 먹는건 로또번호 맞추기 같은 거라 꽤 힘든 일이다. 그래도 그 기쁨을 한 번 누리면 중독되긴 하지만 한마디씩 던지고 뭔가 되돌아 왔을 때, 못 알아먹으면 기쁨보다 자괴감에 푸욱 빠지고 만다. 아 조급한 내 성격.

영문법을 잘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독일어 문법이 어렵다고 말하는데, 나로서는 문법적으로 어려운 것은 영어나 불어나 독어나 마찬가지였다. 죄다 어려우니 심리적 위화감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독문법을 익히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아니고. 영어공부 할 때도 잘 안하던 단어장을 만들어서 꼼꼼히 정리하기 까지 하던 나. 역시 처음 3주정도는 정말 열심히 했고, 그 다음 3주 정도는 어지간히 하다가 뭐가 그리 바빳는지 하루 이틀 수업을 빼먹다 보니 도저히 따라갈 수 없게 되었고 레벨테스트에서 낙방. 재수강을 해야 했다. 그렇게 또 3달쯤 지나가자 동기부여도 어디론가 실종되고 너무 급하게 그만 두고 말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채 반년도 안 되는, 5개월도 안 되는 그 독일어 공부가 이후 한글 번역된 칸트나 니체, 훗설과 하이데거 책을 보면서 도움이 되더라는 것. 거짓말 같지만 대단한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적어도 그전 까지는 단어 하나 때문에 오해하거나 이해가 안되었던 부분이 사전 조금 뒤적인 것으로 이해가 되었다. 독일철학의 난해함이란 번역의 문제인가 싶을 정도로. 그런데 내 생각은 정말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금새 또 알게 되었다. 하이데거에 대한 독일인들의 농담에 <Sein und Zeit> (존재와 시간)은 언제쯤 독일어로 번역되나? 라는 게 있다. 그게 그런거다. 훗설의 용어나 하이데거의 용어는 그들에게도 어렵다. 행복하지는 않지만 위안은 된다.


그리곤 Auf Wiedersehen! Das Deutsche. 안녕, 독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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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붕대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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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araria.textcube.com BlogIcon 善水 2010.10.02 04: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ㅎㅎ보통 외국어를 배울때 기본? 알파벳->단어 순으로 익히는것 같은데
    친구중에(중국인) 대략 3개월만에 영어를 프리토킹한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는 언어를 이해하는것 같았는데 억양같은 들리는 그대로 그 느낌을 먼저 흡수?하더라구요 제가 가끔 한국말을 하면 그 높낮이 톤, 강약의 정도 그런것을 바로 캣치해서 금방 제게 똑같은 말을 하는데 저는 그게 너무 신기하고 재밌었어요. 저는 마땅히 표현할 단어에 머리 굴리고 있는동안 친구는 술렁술렁 분위기에 따라 들은대로 따라하기 시작하면서 언어가 완성되어가더군요. 아마 꼭 우리가 어렸을때 모국어를 배우던 방식처럼이요. 그때 그친구를 보면서 말하려는것에 집중되어있는것과 들으려는 것에 집중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 범 인류적인(?)고민이 들까말까(?) 했던것 같습니다. 세계평화에 이바지 하....쿨럭; 갠적으론 일본영화나 애니를 보면서 자막을 치우고 지금껏 봤더라면 벌써 유창해졌을거란 생각이 ? 믿거나 말거나 ㅎㅎ

    • Favicon of http://boongdae.tistory.com BlogIcon 붕대소녀 2010.10.02 05: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범 인류적인 고민... 세계평화에 이바지... 왤케 웃기심 ㅋㅋ

      언어적 재능이란게 분명 있는게 분명해요. 음악적 재능과 마찬가지. 어릴때, 중1때... 피아노를 체르니 40번 까지 쳤는데, 교회 찬송가 반주를 못했어요. 반주자가 아파 못나왔을때, 전도사님이 절 시키는데 ㄷㄷㄷ. 무조건 외우지 못한 악보는 못치는 주입식 교육의 희생양. ㅋ(절대 제 재능없음을 탓하지 않음.)

      반면 제 가족은 피아노 학원 다녀본 적 없는데 곧잘 쳐요. 늘 무시당합니다. ㅠㅠ

      그런데 중국애들이 확실히 영어를 빨리 배우긴 하더라구요. 어순이 같아서 편한듯. 우리가 일본어 배우기가 상대적으로 쉬운것과 마찬가지인듯요. 뭐 더듬거리더라도... 중국어랑 일본어는 슬픈외국어 씨리즈 4,5편쯤 나올듯요. 기대는 마시고, 걍 봐주셈~ ㅋ

  2. Favicon of http://blog.naver.com/hanjin1633 BlogIcon LordKang 2011.01.22 20: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올해 철학과에 진학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서양철학 수업내용을 이해하고,
    그 수업에서 좋은성적을 받기위해서는 독일어 원서 독해가 가능할 정도로 독일어를 할줄 알아야하나요?
    원서강독은 대학원 과정에서나 하는줄 알았는데요...

    학부과정에서도 출중한 독일어능력이 요구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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