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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추석들 보내시는지요? 


이런 저런 핑계로 올 추석엔 아무데도 안가고 집에서 청소, TV, 새로 구입한 책들, 육개장과 함께 부부 오붓하게 지내고 있는 중이다. 조금 풀어서 고쳐 쓰자면 청소에는 별 기여를 안하고, 새로 산 책을 손에 쥐기만 한 채 TV에 눈을 맞추고, 고기보다 고사리가 많은 육개장의 씁쓸한 맛을 즐기며 일절 다른 음식은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 이번 추석에 큰댁으로 가지 않은 이유는 음… 몇 가지가 있는데, 우선 지난 설에도 안 갔다는 것. 비가 많이 왔다는 것. 부모님이(특히 어머님이) 별로 오고 싶지 않으면 안와도 된다고 말씀하신 것. 무엇보다 정말 꼼짝도 하기 싫다는 것 등의 이유가 있다. 누가 보더라도 자랑은 아니겠지만 왠지 부러워할 사람도 있을 듯. 

위에 든 여러가지 이유들은 어짜피 제 아무리 멀어도 한 시간 거리인 큰댁, 가족들의 집 위치를 감안할 때, 일단 살짝쿵 움직이기만 하면 더 이상 이유가 안 될 이유들 뿐이다. 애초에 제대로 된 이유도 없었지만. 뭐 별로 살가운 친척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지라, 아침에 모여서 제사 지내고 밥 먹고 바로 빠이빠이하는게 명절의 정해진 수순이다. 그러니 그다지 부담 될 일도 아니고.


그런데도 그 짧은 순간 쏟아지는(쏟아질) 질문들이 싫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아주 어린 시절 부터.

고등학교 때 까지는 "공부 잘하냐?", "어느 대학 갈꺼냐?" 등등의 질문들 잠시 지나가고 나면, 특별할 것 없는 엄마와 숙모들간의 자식자랑 신경전들이 이어지고, 사는 형편들과는 별로 안 어울리는 금액의 용돈들 교환해 주시고 빠이빠이. 돌아오는 차 안에서 "넌 얼마 받았니?" 로 시작되는 엄마의 칼 같은 정산과 짧은 논평. 

대학시절은 "어느 대학 갈꺼냐?" 대신 "어디 취직 할꺼냐?"로 바뀌고, "애인 있냐?" 정도의 변주. 엄마와 숙모들간의 자식자랑 신경전은 우열관계가 조금씩 명확해지면서 조금 심심해지고, 여전히 사는 형편들과는 전혀 안 어울리는 용돈 교환식과 정산, 논평. 

백수시절은 제발 좀 안 물어 봐줬으면 하는 질문들은 당연히 나오고, 이어서 "OO이 니네 회사 사람 안뽑냐? 붕대 좀 데려가라." 따위의 훈훈한 덕담들. 대부분 건설회사나 유통업, 세일즈 등. 적성은 물론이고 내 경력과 전공과는 어짜피 무관한 직종이라 좀 더 부담 없는 덕담이 오간다. 가끔 이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몇몇 친지들 때문에 곤란하기는 하지만, 짐짓 각종 헤드헌터들이 나를 모셔가려고 안달이라고 구라를 쳐서 모면한다. 


일을 하게되고, 경력도 좀 쌓이고 나서 내 명함에 'OOO Director'(붕대는 과거 영화CG감독, 전문용어로 VFX Supervisor, 우리말로 특수시각효과감독이라는 거창한 타이틀로 한 동안 일했다, 사족이지만 기술이 스페셜하지 않아서 할 수 있는 행정 위주의 Generalist 직책인 셈) 라고 새겨지고 나서는 가슴을 활짝 펴고 있을 수 있었나? 그게 또 아니다. "요즘 무슨 영화 찍어?" 라는 질문에 관여하는 작품 이름을 대면, 대부분의 반응은 "음… 얘 별로 못 나가나 보다." 인 듯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영화관련 종사자나 기자, 또는 매니아 아니고서야 작업중인 영화제목만 듣고 뭘 알겠나? 이런 이유로 심플하게 제목 말하고 침묵하기는 당장은 꽤 편리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영화가 본의 아니게(?) 뜨고, 비상한 기억력을 가진 친척이 한 명쯤 있어서 길거리에서 1박2일 찍는 강호동이라도 만난 듯한 표정으로 "너 지금 대박 난 그 영화 감독이지?" 라고 물어올라 치면 꽤 진땀 나는 상황이 벌어진다. "아… 제가 영화감독이 아니구요. 저는 그저 영화 일부에 참여하는 스탭이에요." 라고 설명하고 자연스레 넘어가면 좋은데, 눈치를 보아하니 "접때는 디렉턴가 뭔가 감독 같은 거 한다더니 시다바리 였어?" 하는 분위기다. 뭐 그 정도 분위기로만 넘어가도 괜찮은데, 가끔 거드시는 분이 있기도 한다. "신문 보니까 월급도 제대로 못받는다 하던데, 좋은 대학 나와서 뭐하는 짓이냐?", 또는 "이젠 좀 제대로 된 일을 하지?" 등등. 

그런 이야기에 일일이 설명할 자신이 없는 나는 그저 "네~" 하고 빠이빠이 시간을 카운트 다운하면서 버티는 편인데. 문제는 울 엄마. 나름 설명을 꼭 하셔야 분이 풀리시는 모양이다. 얘는 OO도 했고, OOO도 했고, OOOO도 해서 그 쪽 분야에선 잘 나가는 아이라고. 대박이 나면 어쩌구 저쩌구.(영화 대박나는 거와 내 수입은 전혀 상관없었음에도) 사실 엄마도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지 알 턱이 없는 관계로 설명이 오해를 북돋기만 할 뿐이지만 뭐 어쩌겠나. 난 도저히 설명할 자신이 없는 걸. 

한 번은 전자부품을 만드는 사업체를 운영하시는 친척 하나(아마도 주식투자 하시면서 알게 되신 듯)가 내가 다니던 회사(패션잡지 만드는 회사로 더 유명) 이름을 보고난 뒤, "붕대야 니가 하는 일이 그럼 마크 제이콥스나 정구호 같은 양반처럼 결국 니 이름으로 브랜드를 만들어야 뜨는 거니?" 라고 마치 투자라도 해줄 듯 물어보셨다. 0.5초 만에 질문을 이해한 천재붕대. "뭐 비슷한데 그 사람들은 옷을 만들고, 저는 이미지를 만드는 차이죠." 라고 신중하고 진지하게 답했다가 2시간쯤 설명해야 하는 일도 생겼다. 2시간을 설명했지만 그 분은 나중에 나에게 양복 한 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 올지도 모른다. 물론 그 후론 어떤 질문에도 일절 대답은 "네에~" 로 통일했다. 


어른들과 대화하기는 나에겐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인 듯 하다. 나도 설에는 조카들 세뱃돈을 줘야 하는 '완전한 어른'이 됬는데도 여전히 어렵다. 지금의 나로선 "네에~" 가 유일한 방법. 

"오우, 그 영화 잘 봤어! 재밌더라."
"네에~"
"돈 많이 벌었겠네?"
"네에~"
"어쩐지 얼굴이 좋아졌어"
"네에~"
"요즘 일 많아졌겠네?"
"네에~" 

"대체 이 일을 어찌하누?" 하고 잠시 고민하던 시절은 이미 옛일.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사는 게 훨씬 편하다. 


그런데 나만 이런게 아니다. 잘 알려진 박물관에서 학예연구사로 일하고 있던 울 가족. 친척들은 그 박물관 매표소 직원인줄 안다. 아니라고 몇 차례 해명하고 하는 일을 설명했었지만, 그래봐야 친적분들이 그 박물관에 가서 매표소를 기웃거리시다 안보이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임에 틀림 없다. 

"음 오늘은 얘가 쉬는 날인가 보다."

Posted by 붕대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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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sgoi.tistory.com BlogIcon parrr 2010.09.22 13: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희도 명절이면 근황 파악과 상당한 열혈 오지랖을 발휘하시는 분들이 계셨는데요. 전 단호하게 절연:했습니다.
    웃으며 말 할 이야기도 못되지만 이 쪽으로의 사회생활을 원활히 못하는 저로서는 차라리"라는 명목이 발휘 되었었는데요.ㅎ

    명절 편안한 휴일 되시구요. 맛난 음식 많이 드시구요.~ 붕대님

    • Favicon of https://boongdae.tistory.com BlogIcon 붕대소녀 2010.09.22 16: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단호함 좀 부럽습니다. 전 어영부영 절연: 중인 셈이라. ㅋ 그나저나 어딜 안다녀오니 (얻어온 음식이 없어) 먹을게 없네요. 쏘세지야채볶음에 맥주나 먹을까 고민중인데 추석저녁메뉴로 딱이지요? ㅋ

  2. Favicon of http://highdeth.tistory.com BlogIcon Highdeth 2010.09.22 15: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다음에) 명절에 그런 질문을 주시면 "빨갱이 역사가"라 이야기하려구요. "ㅇㅇ님께서 TV볼 시간에 제 책을 사서 읽어 주시면 잘 먹고 잘 살거 같습니다." 라고 얘기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_= 저 개새끼될까나요?;;;;

    P.S. - 비피햬는 없으신가요?

    • Favicon of https://boongdae.tistory.com BlogIcon 붕대소녀 2010.09.22 16: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음... '빨갱이 역사가' 굉장히 친절하고 명료한 설명이지만 대체 어떻게 이해들 하실런지 궁금하군요. 철저한 반공주의자쯤으로 여겨질지도.

      비피해는 있을턱이 없는 동네에 삽니다. 어라 이렇게 말하고 보니 꽤 부자동네 사는 듯 해 보이는군요. 그저 아파트 7층일뿐인데. ㅋ 계신 곳은 별 일 없으실테죠?^^

    • Favicon of http://highdeth.tistory.com BlogIcon Highdeth 2010.09.22 16: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루사와 매미가 왔을때도 멀쩡했답니다^^;;

  3. Favicon of http://araria.textcube.com BlogIcon 善水 2010.09.24 16: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00도, 000도, 0000도 저도 봤는데... 아주 수작이더라는.....(잉?ㅋ)
    제가 지금 하는 일이 너무 즐겁고 재밌어 죽겠어서 신이 막 나면 그때는 두시간이고 세시간이고 설명하는것도 귀찮지 않을까요? 저는 옛동네친구의 오랫만의 전화에 그런 질문을 받으면 언제부턴가 그냥 '시 쓴다~'
    재미없는 질문들말고 제게 그래주시듯 재밌는 질문해주시는 붕대이모고모숙모 되주세요~~불끈.

    • Favicon of https://boongdae.tistory.com BlogIcon 붕대소녀 2010.09.25 02: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시 쓴다~' 요거 써먹을께요.ㅋ^^
      대학때 친구 하나는 "요즘 뭐해?" 라고 물으면
      "존재해~" 라고 대답했었는데. 그것 참 아무리 생각해도 멋있는 것 같아요.